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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남일보] 악의 평범화에 갇힌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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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톡톡브레인심리발달연구소
작성일24-08-30 14:49 조회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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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의 평범화에 갇힌 사회
출처: 광남일보 2024년 08월 28일 '악의 평범화에 갇힌 사회', 톡톡브레인심리발달연구소 박병훈 대표님


 

[아침세평] 모기의 입도 비뚤어진다는 처서가 코앞이다.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날씨만큼 맹렬한 악의 기운을 느끼며 살아가는 일이 필설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프고 고달프다.

국회의 인사청문회에서 후보자들이 보인 모습은 가관이다.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이라고 우기는 공직자를 보면서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요즘이다.

평범한 모습을 한 채 우리 삶에 가까이 다가와 있는 악에 대한 공포가 엄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악을 양산하는 체제를 지닌 사회 속에서는 악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일정한 사회적 조건이 주어지면 사람은 ‘누구든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악을 저지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켜주는 일들을 수없이 목격하고 있다.

이태원 참사와 채상병 사건을 겪으며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고 가해자들이나 책임자들의 자기합리화나 변명을 들을 때면 인간성에 회의를 느낀다.

아돌프 아히이만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육백만명의 유대인 학살을 자행한 사람이다.

나치 친위대원이었던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비롯한 소수 민족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수용소로 보낸 후 학살을 주도했다.

아이히만의 재판이 열리기 전까지 사람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상상력과 언어적 감수성을 동원해 아이히만을 세기의 악인 혹은 세기의 괴물로 묘사했다.

그러나 재판을 통해 드러난 그의 모습은 평범한 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그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아이히만은 오히려 법질서를 존중하고 직장 내에서는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스스로를 이상주의자로 여기며 유대인들이 가졌던 시온주의에도 동질감을 느낀 사람이기도 했다. 그에게서 어떠한 범행 동기도 발견할 수 없었다.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호도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리안 민족의 우월성을 신봉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유대인에 대한 근거없는 증오심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욕구의 결핍이나 인간의 경향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이다.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후 그들의 존재 흔적 마저도 깨끗이 지워버린 세기의 악마답지 않게 말이다.

아이히만은 재판 과정에서 유대인을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면서 악이 고유한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의 실체는 평범성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의 추방과 강제 이주, 학살과 관련한 상부의 명령을 오로지 자신의 직무로만 받아들여 로봇처럼 따를 뿐이었다.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악의 평범성을 일으키는 조건은 세 가지이다. 인간의 사유, 말하기, 판단의 부족이다.

인간은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를 해야 한다. 사유를 통해 자신의 행동에 제동을 걸고 현상에 머무는 자아를 향해 의문을 제기하고 숙고해야 한다. 사유는 스스로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도록 해준다.

사유가 자신과의 대화라면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판단이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사유를 검열하고 숙고해 보는 정신활동이 판단이다.

대화를 통해 확장된 사고는 판단의 독단성을 제거하고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게 한다. 다른 사람들의 스키마에 자신을 비춰보는 일은 인간의 불완전한 판단을 보완해 준다. 그리고 보이지 않은 곳의 어려움을 볼 수 있게 한다.

한 개인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모든 세계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실존적 조건이다.

인간의 속성 가운데 한 가지가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산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수혜를 받는 개별적 존재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삶을 구성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따라서 관계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야스퍼스의 이야기처럼 고유한 자기됨을 간직하면서 타인의 실존을 방해하거나 배제하지 않는 사회가 오기를 바란다. 가을은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기에 좋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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